<2016. 1. 18>
작가
아담 스미스,러셀 로버츠 지음
출판
세계사
발매
2015.10.27.

애덤 스미스의 저서라고 하니, 어려움부터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과연 내가 이 책을 읽고 뭔가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떤 배경지식이 있어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고 보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어려운 부분이 있긴했었다. 하지만 신기하리만큼 쉽게 풀어냈고, 공감가는 부분은 물론,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우선, 체스판의 말들을 함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들에는 규칙이 있고,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그룹에 들어가서 내가 이루고자하는 것들을 앞뒤 재지 않고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한낱 몽상가에 불과하지 않을까. 지금 학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문제가 야기되었다. 과연, 학회비를 집행부에 사용해야하는 금액이 어느정도가 허용되는 것인가? 여태까지 사용해왔던 데로 하는 것이 옳을 지, 아니면 그것을 줄이고 학생들을 위한 쪽으로 돌리는 것이 좋은지.

분명 변화는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방식을 고수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결정은 여태 해 왔던대로 집행하자. 그렇지 않다면, 같이 집행부를 하기로 했던 친구들의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을 뿐더러, 예민한 돈문제에 있어서 몇 가지의 문제가 더 생긴다면, 그것은 학부생들을 위한 사업을 하는데에도 피해가 갈 수 있기때문이다. 글쎄, 이 생각이 나중에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결정이었는 지, 변명이었는 지 객관적으로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내 안의 양심. 즉, '공정한 관찰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던지 공정한 관찰자가 나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말해주기 때문에 나는 조금이라도 양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정말 재미있었다. 양심이라는 추상적인 매체를 '공정한 관찰자'라는 가시적인 매체를 통해 내가 조금 더 이타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항상 '공정한 관찰자'가 보는 앞에서 부끄럼없이 행동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실 하나님이 지켜보고있다는 것과 동일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이 공정한 관찰자가 아닐까? 어디서든 나를 항상 지켜보시기 때문에 아무도 안 보더라도 조금은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요즘은 공정한 관찰자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오늘 세종시 집에서 나오면서 많이 놀랐다. 처음 세종시에 올 때, 사람, 차, 쓰레기가 없어 놀랍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같은 묶음일까? 사람이 늘자 당연히 차가 늘었다. 이 정도는 인정 할 수 있다. 하지만, 쓰레기가 너무 늘었다. 차도 옆 풀밭은 당연하다는듯이 쓰레기가 넘쳐났다. 마치 그곳에 버리는 것이 규칙인 것 마냥. 

만약, 내가 이것들을 모두 치운다면, 세상이 변할까? 그렇다면 나는 이 쓰레기들을 못 본 체 지나가야하나? 아니면 이것만이라도 치워야하나? 부끄럽게도 나는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치우라고 한다. 물론, 내가 그 쓰레기들을 치운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쓰레기를 버리던 사람들이 그 쓰레기를 자기 주머니에 넣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쓰레기들을 치우면, 적어도 그 곳의 쓰레기는 치울 수 있다. 그것마저 치우지 않는다면 너무나도 많은 쓰레기들이 넘쳐나지않을까? '나부터 하자' 남이 해서 나도 하는 것이 아닌, 내가 먼저 시작하자.




사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칭찬을 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행여 내가 사랑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봤다.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면 안되나?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하니 너무 힘들고, 비참한 일이 많았다. 나 자신을 속이는 일도 있었다. 사실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다음 책을 읽으면서 이 답을 찾을 수도 있고, 어쩌면, 1년, 2년 혹은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다만, 훗날 인간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 때 그 친구랑 조금 더 친하게 지낼 걸.' 이라는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

[독후감]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 아담 스미스, 러셀 로버츠

<2016. 1. 18>
작가
아담 스미스,러셀 로버츠 지음
출판
세계사
발매
2015.10.27.

애덤 스미스의 저서라고 하니, 어려움부터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과연 내가 이 책을 읽고 뭔가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떤 배경지식이 있어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고 보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어려운 부분이 있긴했었다. 하지만 신기하리만큼 쉽게 풀어냈고, 공감가는 부분은 물론,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우선, 체스판의 말들을 함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들에는 규칙이 있고,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그룹에 들어가서 내가 이루고자하는 것들을 앞뒤 재지 않고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한낱 몽상가에 불과하지 않을까. 지금 학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문제가 야기되었다. 과연, 학회비를 집행부에 사용해야하는 금액이 어느정도가 허용되는 것인가? 여태까지 사용해왔던 데로 하는 것이 옳을 지, 아니면 그것을 줄이고 학생들을 위한 쪽으로 돌리는 것이 좋은지.

분명 변화는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방식을 고수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결정은 여태 해 왔던대로 집행하자. 그렇지 않다면, 같이 집행부를 하기로 했던 친구들의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을 뿐더러, 예민한 돈문제에 있어서 몇 가지의 문제가 더 생긴다면, 그것은 학부생들을 위한 사업을 하는데에도 피해가 갈 수 있기때문이다. 글쎄, 이 생각이 나중에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결정이었는 지, 변명이었는 지 객관적으로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내 안의 양심. 즉, '공정한 관찰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던지 공정한 관찰자가 나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말해주기 때문에 나는 조금이라도 양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정말 재미있었다. 양심이라는 추상적인 매체를 '공정한 관찰자'라는 가시적인 매체를 통해 내가 조금 더 이타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항상 '공정한 관찰자'가 보는 앞에서 부끄럼없이 행동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사실 하나님이 지켜보고있다는 것과 동일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이 공정한 관찰자가 아닐까? 어디서든 나를 항상 지켜보시기 때문에 아무도 안 보더라도 조금은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요즘은 공정한 관찰자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오늘 세종시 집에서 나오면서 많이 놀랐다. 처음 세종시에 올 때, 사람, 차, 쓰레기가 없어 놀랍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같은 묶음일까? 사람이 늘자 당연히 차가 늘었다. 이 정도는 인정 할 수 있다. 하지만, 쓰레기가 너무 늘었다. 차도 옆 풀밭은 당연하다는듯이 쓰레기가 넘쳐났다. 마치 그곳에 버리는 것이 규칙인 것 마냥. 

만약, 내가 이것들을 모두 치운다면, 세상이 변할까? 그렇다면 나는 이 쓰레기들을 못 본 체 지나가야하나? 아니면 이것만이라도 치워야하나? 부끄럽게도 나는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치우라고 한다. 물론, 내가 그 쓰레기들을 치운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쓰레기를 버리던 사람들이 그 쓰레기를 자기 주머니에 넣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쓰레기들을 치우면, 적어도 그 곳의 쓰레기는 치울 수 있다. 그것마저 치우지 않는다면 너무나도 많은 쓰레기들이 넘쳐나지않을까? '나부터 하자' 남이 해서 나도 하는 것이 아닌, 내가 먼저 시작하자.




사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칭찬을 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행여 내가 사랑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봤다.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면 안되나?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하니 너무 힘들고, 비참한 일이 많았다. 나 자신을 속이는 일도 있었다. 사실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다음 책을 읽으면서 이 답을 찾을 수도 있고, 어쩌면, 1년, 2년 혹은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다만, 훗날 인간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 때 그 친구랑 조금 더 친하게 지낼 걸.' 이라는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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